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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션샤인"에서 이병헌이 열연한 ‘유진 초이’는 누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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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션샤인"에서 이병헌이 열연한 ‘유진 초이’는 누구?

봄n 2023. 2. 3. 16:11

1.
지난 1월 외국인 투자자들이 코스피에서 6조4867억원치 주식을 순매수했다. 
월간 기준으로 역대 세 번째다.

2013년 9월(8조4637억원) 
2012년 1월(6조9515억원) 다음으로 많은 금액이다.

달러 약세와 중국 경기 부양 기대감에 신흥시장으로 글로벌 자금이 몰려든게 매수의 이유라고 한다. 

코스피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이 사들인 종목은 삼성전자로 한 달간 순매수 규모는 2조2200억원이었다. 

다음으로 
에스케이(SK)하이닉스 6322억원, 
신한지주 2644억원, 
하나금융지주 2256억원, 
현대차 2051억원 순이다.





2.
서산 부석사 관세음보살좌상



이 불상은 높이 50.5㎝, 무게 38.6㎏로 14세기 고려시대 때 제작됐다. 

불상 안에서 발견된 결연문에 
‘천력 3년(1330년) 2월 불상을 만들어 고려 서주(서산의 옛 명칭) 부석사에 모셨다’는 내용이 있다.

1527년경 이 불상은 일본 쓰시마의 관음사에 봉안된다. 
물론 이 불상이 어떻게 쓰시마까지 갔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불상이 부석사에 봉안된 뒤 
서산 지역에 왜구의 침입이 많았다는 점, 관음사로 간 불상 안에 복장물이 그대로 들어 있으나 어떻게 옮기게 됐는지를 적은 이안문이 없는 점 등으로 미뤄 약탈된 뒤 일본으로 흘러간 불상일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이 많다.

이 불상이 한국으로 다시 온 건 
2012년 10월이다. 절도단이 관음사에서 불상으로 훔쳤고 부산항을 통해 국내로 들여왔다. 그해 12월 대전경찰청 광역수사대에 의해 절도범들이 붙잡히며 압수된 불상이 대전까지 오게 됐다. 

이후 충남 서산 부석사와 일본측과의 불상반환에 관련한 분쟁이 시작된다

2013년 2월 대전지법이 부석사가 낸 
반환 중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며 
불상은 일단 한국에 남게 됐다. 

2016년 2월 가처분 기간이 끝나자 부석사는 그해 3월 대전지법에 
한국 정부를 상대로 
‘관세음보살좌상 인도 청구소송’을 냈다.

2017년 1월 대전지법은 
“불상을 부석사에 인도하라”고 판결했다. 

2023년 2월 대전고법 민사1부
(재판장 박선준)은 
‘서산 부석사 관세음보살좌상’에 대한 
인도 청구소송에서 
“원고(대한불교조계종 부석사)가 
해당 불상(서산 부석사 관세음보살좌상)의 소유권을 취득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즉 대법원에서도 같은 판결이 나면 
불상은 다시 일본으로 보내야 한다.



먼저 훔친 놈이 임자구나


3.
4대봉사란? 

부모와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까지
4대에 걸친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의식이다. 즉 일 년 제사가 최소 8번 이상이라는 말이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오늘날 고조부모까지 제사상을 차리는 4대 봉사를 이어가는 건 시대착오라는 입장을 밝혔다.
 
조선시대의 법전 ‘경국대전’은 
“6품 이상의 관료는 부모·조부모·증조부모 3대까지 7품 이하는 2대까지 
벼슬이 없는 서민은 부모 제사만을 지낸다”고 명시되어 있다. 

원래 4대봉사는 주자가례를 신봉하는 유학자로부터 보급됐다.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15세를 전후로 결혼하는 조혼 풍습에 고조부모까지 4대가 함께 사는 경우가 흔했다. 
따라서 고조부모의 제사를 모시는 4대봉사는 당연시됐다.

하지만 현재는 조혼 풍습이 사라지고 
결혼 적령기가 늦춰져 고조부모나 증조부모를 대면한 사람이 드물다. 
추모 대상을 모르는 상황에서 4대봉사를 하는 건 시대착오라는 의견이 나오는 배경이다.





4.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이병헌이 열연한 ‘유진 초이’의 실제 모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바로 황기환 애국지사가 그 주인공이다.



황기환 지사는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미군에 자원입대해 전쟁에 참전한 인물이다. 

1919년 6월에는 프랑스로 이동해 
프랑스 베르사유에서 개최되는 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로 온 김규식을 도와 대표단의 사무를 협조하는 동시에 임시정부의 파리위원부 서기장으로 임명되어 독립 선전 활동을 벌였다.
 
그해 10월에는 러시아 무르만스크에 있던 노동자 200여 명이 영국을 거쳐 일본에 의해 강제 송환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필사적인 외교적 노력을 펼쳐 11월에 홍재하 등 35명을 극적으로 구출하여 프랑스로 이송시켰다.
 
이듬해 1월 파리에 주재하는 한국선전단 선전국장으로 불문(佛文) 잡지를 창간하고 일제의 압박을 알리는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을 호소했다.

황지사는 이후 임시정부 외교부 런던주재 외교위원 및 구미위원회에서 활약하다 1923년 4월 17일 뉴욕에서 심장병으로 숨져 현지 올리벳 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묘소는 사망한 지 85년이 지나 2008년 뉴욕한인교회 장철우 목사에 의해 발견돼 알려졌다.

순국 100주년을 기념해 황지사의 유해가 본국으로 봉환될 예정이다.
유해가 국내로 봉환되면 영현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할 예정이다.



5.
‘마스크 착용 의무’ 해제에도 
마스크를 계속 쓰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첫째.
마스크 착용이 습관이 돼 익숙해졌다는 점

둘째.
보건당국의 착용 권유

셋째.
마스크 착용이 타인에 대한 예의와 배려로 여겨진다는 점

넷째.
미세먼지 등 공해에 대한 마스크의 
보호 효과.
 
다섯째.
마스크를 쓰면 화장을 하지 않거나 
표정 관리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





6.
차이나타운의 기원은 언제일까?



19세기 아편전쟁 시기다. 

전쟁 패배로 정세가 불안정해진 데다 대기근까지 겹쳐 중국인들이 대거 해외로 빠져나갔다. 
이 시기 이주인구가 연간 300만∼400만명에 달했다. 
고향을 떠난 중국인들이 낯선 이국땅에서 모여 살면서 차이나타운이 생겨났다.

청나라 멸망부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전까지 극심한 혼돈기에 중국인의 해외이주는 절정을 이뤘다. 
1931년에는 이주인구가 무려 1283만명에 달했다. 
노동자가 대부분인 이들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 철도·운하건설 공사장과 커피·사탕수수·담배 농장에서 

강제노역과 허드렛일에 시달리며 비참한 생활을 했다. 

1970∼80년대 들어서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훈풍을 타고 중국인의 
해외이주 붐이 일었다. 
과거와 달리 이들 중 상당수는 해외에서 유학을 했거나 재산이 많았고 이주한 곳도 부유한 나라들이었다. 
화교사회의 덩치가 커지면서 현지에서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이 확대됐음은 물론이다. 

현재 화교의 규모는 140개국 45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는 
화교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 반대인데
화교를 무척 싫어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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